나의 노가다 23
상대방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여? ㅋㅋ 아까 과묵하게 말도 잘 안하시던데 회사 동료분들이세요?"
"네."
그럼 어쩌지.. 먼저 씻으실래여? 하고 상대방이 물어봤다.
알겠다고 하고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 벽에 걸려있는 가운을 예의상 입고 나왔다.
상대방은 그걸 보더니 훗 웃고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었다.
난 침대에 누워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티비를 보려고 리모콘을 찾고 틀었지만 어떻게 채널 조정하는지도 모르겠고 지이이이 하는 화면 증간 중간 일반 방송만 나왔다.
아무거나 틀어놓고 내가 여기서 잘 모르는 상대방과 몸를 섞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안하고 시간을 떼워야 하나 고민했다.
입사하고 그룹 OT때 멍하니 앉아서 그룹 인사팀장으로부터 들었던 부정과 컴플라이언스 내용이 살짝 떠올랐으나 이런 경우를 콕 찝어서 안된다 라고 말해준거도 없고 난 업체랑 술먹은 것도 아니고 직원들이랑 술을 먹고 이렇게 왔다.
다만 술값과 룸싸롱 비용 그리고 이차 비용은 내가 내질 않았고 이게 부정으로 볼 수 있는 일인가.. 내일 최대리에게 얘기해서 엔빵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화장실이 조용해지더니 나랑 똑같이 가운을 입고 나온다.
그리고 스르르 내 옆에 와서 날 옆으로 보고 누웠다.
"오빠 진짜 이런데 처음이에요?"
"네.. 나이가?"
"오빠는 참 이런데서 호구조사하고 있어? ㅋㅋ 나이는 알아서 뭐하게?"
"오빠라고 하는데 내가 말을 놔야할지 아니면 같이 존대를 해야할지..."
상대방은 슬쩍 손을 들어 가운 사이의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러는 오빠는 몇살?"
"전 올해 스물여덞이에요."
"어머? 진짜? 나이에 비해서 진짜 동안이다. 난 오빠보다 다섯살 어려요."
진짠지 가짠지 알게모람.
"그럼 말 편하게 할께.. 이름이 뭐야?"
"다희요. 근데 오빠 우리 이렇게 얘기 할 시간 별로 없을껄."
그러고는 입을 맞춰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드러운 감촉과 여자여자의 향기로 내 몸이 감싸졌다.
그렇게 우리는 가운을 벗고.. 흠흠 자세한 얘기는 쓰기 좀 그러니 생략하도록 하겠다.(흠...)
땀에 젖어 서로를 옆으로 껴안고 누워서 담배 한대를 폈다.
다희는 숨을 고르면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옆모습 진짜 잘생겼다. 코가 오똑하네.. 근데 무슨 일 해?"
"어 나 건설회사 다녀."
"아.. 어디?"
XX에 다닌다고 말하니 다희는 이야 좋은회사 다니네? 라고 말했다.
다희는 내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오빠는 여자친구 있지? 결혼은 아직 안했지? 라고 물었다.
"여자친구는 얼마전에 헤어졌고 아직 결혼은.."
다희는 깜짝 놀라며 어머 진짜? 오빠같은 사람이 여자친구가 없냐며 물었다.
그러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는데 자기는 서울에 있는 XX여대를 다니고 영문과 삼학년 휴학 중이라 했다. 그냥.. 집안 사정도 그렇고 내가 돈 벌 수 있는게 이런게 제일 빠르기도 하고 해서 일한다고 했다.
잔짜 대학생인가 싶어서 말하기를 시켜봤더니 꽤 잘한다. 진짠가보다.
전화벨이 울리고 다희는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는 자기 이제 가봐야 한단다.
아쉬웠다. 오랜만에 여자여자와 이렇게 말을 제대로 섞는다는 것이.
조금만 오분만 더 얘기하자 해서 눕혔는데 다희는 웃으면서 아냐 오빠 울 담에 또봐 하고는 벌떡 일어서서 화장실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이 기분. 근데 장소가 그리고 상대방이 다희라니(어차피 예명입니다) 기분이 멜랑꼴리하다.
다희정도면 진짜 어디가서 부끄럽지 않게 옆에 데리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외모와 몸매다. 물론 전 여자친구와 비교하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다.
다희는 화장실에서 속옷을 입고 나와 다시 홀복으로 갈아 입었다.
다 입고는 나를 보고
"오빠 핸폰!"
어? 나 휴대폰을 룸에 놔두고 왔나? 왜 찾지? 라며 바지 주머니를 뒤졌는데 있다.
"어 있어."
"아니 좀 달라고. 줘봐."
응? 왜? 꺼내서 주니 전화화면을 열어서 자기 번호를 꾹꾹 누른다. 그리곤 통화버튼 연결.
지이이잉 하며 다희 휴대폰이 울렸고 다희는 이거 내 번호니까 저장해라고 말했다.
다희 보는 앞에서 다희 라고 전화번호를 저장하자 다희는 내게 뽀뽀를 쪽 해주며 우리 담에 또 보자. 난 오빠가 맘에 들어 안녕 하곤 밖으로 나갔다.
주황빛이 도는 어두컴컴한 객실에는 어지럽혀진 침대시트와 살짝 열린 화장실 문틈 사이로 형광등 빛이 길게 드리워져 내 다리위를 비쳤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창문 밖으로는 차들이 달리는 소리 그리고 주변 유사업종에서 나는 신나는 음악소리.. 그리고 가끔 복도에서 나는 우렁찬 벨보이의 안내멘트가 들렸다.
조용히 누웠다. 휴대폰을 열어 시계를 보니 열한시 조금 넘었다. 아까 벨보이가 자고 가도 된다고는 했는데 왠지 그러기는 싫다.
술이 점점 깨오는 것 같았고 통화목록의 다희 전화번호를 봤다. 그리곤 아까 나눴던 얘기를 곰곰히 곱씹었다.
여대생.. XX여대.. 영문과... 도톰하게 이쁜 가슴.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도 안갔다.
이건 영업용으로 찍어준 번호고 내가 이런 곳을 다시 올 것 같지도 않고해서 전화번호를 삭제했다.
한겨울밤의 꿈이라 생각하며 씻고 옷을 입고 문을 나섰다.
엘레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있던 벨보이가 나를 보더니 부리나케 뛰어와 형님 주무시고 가셔도 되는데 벌써 가시게요? 하며 여명 808을 딱 뚜껑을 까서 건냈다.
하.. 강남이라 이런거도 주는가보다.
고맙다며 서 있었는데 벨보이는 형님... 하고 쳐다본다.
아. 아까 최대리가 준 돈.
주머니에서 몇만원을 꺼내 건냈다. 이럴때 주라고 꺼낸건가.
예상외의 팁을 받은 벨보이는 허리를 구십도로 꺾으며 감사합니다 형님! 하고는 꿀떡꿀떡 다 마신 여명을 건네받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나를 향해서 다시 한번 구십도로 인사하며 또 오십시오 형님! 한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였는데..
나와서 지하철을 향해 걸어갔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잔뜩 물들었고 지금의 난 좀 서럽고 처량하고 그렇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차를 가고 집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불쌍해보였다.
다음날 최대리는 얌마 어제 너 파트너 죽이던데 괜찮았냐? 라고 물었고 난 예의상 네 감사합니다 근데 비용은.. 하고 물었다.
"하 이런 귀여운놈 그런건 니가 신경쓸 것도 아니고 형이 알아서 할테니까 걱정은 넣어두시고."
형이라니. 언제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바쁘게 움직였다.
일하면 일할수록 텅빈 마음은 더 커져만 갔고 괜스레 중학교때 들었던 이오공감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혼자 청승떨고 그랬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그 날.
서울지역에서는 폭설이 내렸고 가볍게 온다던 눈이 이틀 연속으로 왔다.
길거리는 마비되었으며 교통사고도 빈번했고 무엇보다 코어월 구차 타설이 지장을 받았다.
검측 다 받고 폼까지 닫아놨는데 기습적으로 밤부터 눈이 온지라 발판위에서 바라본 벽체는 이미 하얗게 눈이 쌓였다.
감리 이부장은 진작에 보양을 해놔야지 아무리 열선 보양을 한다고 해도 눈올때는 방법이 없잖은가 라고 재검측을 한다고 했다.
3.4m 타설높이는 블로워로도 해결이 안됐고 업체에서는 뜨거운 물을 부워 녹이는 것이 어떻겠냐 그리고 공구리치다보면 다 녹는다 했지만 씨알도 안먹히는 얘기다.
결국 폼을 다시 열기로 했다.
한쪽만 열어서 직영이 블로워를 들고 폼 바깥으로 불어내고 다 불고 난 후 다시 폼을 닫고 상부는 파란 캔버스로 덮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니 꼬박 하루가 걸렸고 이어서 재검측을 받고 타설을 했다.
한번 타설시에 134m3. 레미콘 스물두대가 들어가는 물량이고 대략 다섯시간 정도가 걸렸다.
칠 때마다 아직 CPB가 설치 전이라 펌프카가 들어와서 치는데 곧 난간대에 닿아서 펌프카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CPB는 코어 외벽에 지지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으며 오로지 코어 타설용으로만 계획되었다. 우리 현장은 이런 코어가 다섯개나 있는데..
이 CPB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유압으로 올라가는 구조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최고의 장비업체가 들어왔다.
어렴풋한 기억에 이 장비팀의 군기는 어마어마했다. 뺀찌로 두드려 패는걸 본 적도 있고 군기가 빡 들어서 상명하복이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업체의 라팀장은 외부인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완만하고 협조적인 사람이었다.
타설이 끝나고 내일 할 일도 정리 해놓고 오랜만에 박과장 임기사와 한잔 했다.
박과장은 내년 기술사 시험을 봐서 꼭 붙었으면 좋겠다 하고는 푸념을 했고 내가 기술사를 따서 꼭 다른회사 정직으로 가겠노라 했다.
큰 덩치에 날카로운 눈매가 이제는 무섭지 않고 든든한 형 같다.
"과장님 기술사 따시면 여기서 정직전환은 안되요?"
박과장은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게 계약직에서의 정직 전환이라 했다.
아.. 저런 인재를 놓치기엔 안타까운데.
임기사는 최대리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놨다.
하는거도 없이 주딩이만 바쁘고 맨날 김기사님만 혼자 다 하는것 같다 얼릉 인원 보충되서 다시 우리 일공구로 와서 일해야 하는거 아니냐 했다.
뭐 그러게요 하고 넘겼지만 술이 좀 취한 임기사가 말했다.
"아니 뭐 따지고보면 최대리 나이도 우리랑 동갑이고 나랑 경력도 비슷해. 근데 누구는 정직 대리고 누구는 현채직이고 니뮈.."
박과장은 임마 그러게 누가 학교 다닐 때 놀래? 라며 웃음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임기사는 그것이 매우 억울했었나본지 더 목소리를 크게 했고 난 최대리가 나랑 동갑이란 말에 진짜? 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니 뭐 막말로 안그러냐구요. 제가 비록 공고를 나와 전문대를 졸업하고 여기 이러고 있지만 최대리랑 비교해서 현장일 뛸 때의 내가 꿀리는 점이 뭐가 있냐고요. 과장님은 학교를 SKY 나오셔서 졸업은 못했지만 다들 그건 인정해주고 그러자나여. 아이구 김기사님 앞에서 이런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꽤 취했다.
박과장은 묵묵히 듣더니
"아이고 오늘 술 많이 먹었네 임기사.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 그러니 너도 여기서 안주하지 말고 자격증을 따고 노력해서 좋은회사 가셔."
임기사는 그날 응어리가 진 속마음을 다 털어놨다.
내가 예전에 자기랑 동갑이니 말 놓자고 했던걸 상기하며 나에게 너무하다고 했다.
"아니 군대도 ㅆㅂ 짬밥이 먼전데 응? 그때 나 너무 서운하드라고. 나이는 같지만 내가 짬이 당신보다 삼년 이상이 많고 사년을 이제 채웠는데 말이지 딸꾹!"
하.. 취했네. 뭐 내 입장을 보면 임기사의 맘을 이해못하는건 아니나... 좀 그랬다.
"아 예 임기사님 많이 취했네요.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신입이라서 몰랐네요."
"몰랐다고? 모르면 다야?"
임기사는 꽤 거칠어졌다. 아 왜 최대리를 향한 응분이 나에게 오냐고.
박과장은 듣다가 임기사한테 말했다.
"야이 쌔꺄. 너 왜 술을 어디서 쳐먹다가 꼬장을 부려! 내가 너 글케 가르치던? 니가 지금 하소연을 하고 응분을 푸는 상대가 왜 김기사여야 하는데? 김기사가 너한테 뭐 잘못한게 그리 많다고? 응!"
임기사는 그런 박과장을 보고는 휴... 한숨을 쉬며 죄송합니다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임기사가 운다. 처음엔 숨죽여 울다가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나도... 내가.. 나는.."
임기사는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계속 그러다가 좀 진정이 되고는 휙 자리에서 일어나서 외투를 집고는 밖으로 나갔다.
따라나가려 했지만 박과장이 잡았다.
"놔둬. 요즘 쟤 심란한가봐."
그리곤 얘기해주는데 인턴 김기사에게 그렇게 맘이 끌려서 첫날부터 박과장에게 인턴 김기사 좋다고 했단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연애상담해가며 인턴 김기사를 좋아했는데 어느날 보니 인턴 김기사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었고 그런 나는 모른척 뒤로 몰래 사귀는 것 같아서 나에 대한 실망감이 컸었다고 하드라.
서투른 임기사는 인턴 김기사에게 아무도 모르게 저녁 약속을 잡고 밥을 먹고선 데려다주면서 고백했었는데 인턴 김기사는 자기 현장에 좋아하는 사람 있다면서 그게 나였다고 더 이상 이런걸로 힘들게 하지 말아달라 했다고 하드라.
괜한 자격지심에 그 때부터 임기사는 괴로웠고 나랑 인턴 김기사가 사소한 얘기만 해도 그렇게 질투가 나고 싫었다고 하드라.
마침 저번에 내가 술에 취해서 인턴 김기사를 찾았을 때 박과장도 의례 나랑 인턴 김기사랑 사귀는 줄 알았다고 했다.
하... 과장님 그런거 아니라고 우리 그런 사이 아니고 인턴 김기사는 나 말고 다른 사귀던 교회오빠가 있었고 그 오빠랑 다시 사귄다고 했다.
하지만 인턴 김기사가 나 좋아했어서 만나보자라고 한건 말 안했다. 괜히 그러면 더 어색해질 것 같기도 하고.
박과장은 얘기를 다 듣더니 그런 오해가 서로 있었구만. 그나저나 임기사는 그걸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이라 생각하고 있더라고 했고 너는 공채로 입사해서 그런 걸 못 느낄수도 있지만 게약직 직원들에게는 사소한 것도 큰 상처가 되어 괴로울 수가 있으니 앞으로 임기사한테 잘 해주라 그러더라.
하긴. 어느순간부터 임기사가 나를 좀 멀리 하는 것 같았는데. 근데 인턴 김기사랑은 뭐 아무것도 아닌 사인데. 나도 차였는데 왜...
이해가 안갔지만 뭐 알겠다고 했다.
정리를 하고 나오며 박과장에게 물었다.
"요즘 최대리가 과장님한테 많이 거슬리시죠?"
박과장은 하하 웃고는 그래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근데 자기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아니 무슨 석가모니도 아니고 다 이해해.
집으로 와서 임기사에게 문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