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가다 5
제법 시간이 흘러 나도 이제 현장 구성원으로서 조금씩 일을 하고 있었다.
단체회식 비스무리한 것도 한번 했고 현장 직원들과도 어느정도 친해졌으며 혼자 현장을 나갈 수 있었다.
검측이란 것도 임기사를 따라서 두어번 다녀봤는데 토목 이사가 영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항상 지적사항이 나와서 보수 또는 재작업 후 재검측이 뒤따랐으며 재검측도 일일이 나와서 확인하곤 했다.
혼자 처음 검측 받는 날이었다.
과거 검측사례를 되짚으며 갑지와 체크리스트 그리고 흙막이 도면에 해당부위를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다시한번 날짜 위치 그리고 검측 내용을 확인한 후 감리실로 내려가서 토목 이사를 모시고 검측장소로 향했다.
토공사 업체 차장과 작업팀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항상 그래왔듯이 천천히 하나하나 살펴본다.
용접상태 모살두께 띠장 천공유무를 살피더니 토류판을 본다.
"이거 옹이가 한가운데 있으면 무너지는데 그것도 모르나?"
"네..?"
" 토류판 상태가 불량하다고. 내가 초짜랑 나와서 이런 말도 안되는 애기를 하고 있어야 하나?"
옆에서 따라다니던 협력사 차장이 거들어준다.
"아니 토류판 옹이 진 곳이 어스엥커 천공부위네요. 어차피 구멍 뚫릴 곳에 뭔 옹이를 트집 잡으십니까"
토목이사는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는 한둘셋넷.. 일곱군데 토류판 옹이를 전부 교체하라고 하고선 사무실로 돌아갔다.
쎄보이려 한건지 아니면 그 동안 쌓인 울분이 터져나온건지 그날따라 협력사 차장은 한참을 욕지거리를 하며 서 있었고 반장을 비롯한 작업자들은 멀뚱히 서서 다음 작업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협력사 차장은 휙 올라가버렸고 나와 작업팀만 남아있었는데 작업팀 반장이 묻는다.
"기사님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요?"
"감리가 얘기했으니 갈아야죠..."
"아니 가사님도 생각해보소! 이게 도류판을 갈아야 할 이유냐고? 내 노가다 삼십년 하면서 도류판 옹이때문에 데나우시 난거는 첨 보오!!"
체크리스트 항목에는 토류판 상태에 대한 내용도 분명 있었다. 그것보다 왜 토류판을 도류판이라고 하는지 그 순간 든 생각은 그거 하나 뿐.
"암튼 난 이거 못갈어요! 나이 이거 갈아낄라면 위에꺼부터 다 걷어내고 다시 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한다는겨!"
그러고는 작업팀을 데리고 철수해버렸다.
묵묵히 바라보다 나도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들이 왜 나한테 난리야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걸 어떻게 박과장에게 보고를 해야 하느냐가 더 큰 고민이었다.
임기사를 전화로 불러본다. 여전히 좌표 찍느라 바쁘고 어딘지 위치를 물어서 내가 찾아간다.
이리저리해서 검측은 재검측이 나와버렸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더니 임기사는 나를 좀 한심하게 쳐다보면서
"그러게요. 업체보고 다시 하라고 해야죠?"
그리고선 계속 바쁜척을 하길래 수고하라고 하고는 사무실로 갔다.
'그래 나도 알어. 업체보고 다시 하라고 하면 되는거. 근데 분위기가 그랬는데 이럴 땐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나도 모르는데. 대마찌 얘기하며 재시공비를 줄거냐고 묻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결정해.. ㅜㅠ'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어떻게 이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지 정리하느라 복잡했다.
사무실에 가서 정수기로 다가가 물 한잔 마시면서 슬쩍 분위기를 보니 박과장이 자리에 없다.
팀장님은 자리에 앉아서 뭔가 하고 계신다.
나에게 싫은소리 한번 안하시던 분이시니 가서 의견을 여쭈어봐야겠다.
팀장님께 다가가 이러저러해서 재검측이 났다. 그리고 업체는 못하겠다고 하고 작업팀은 철수했다라고 최대한 사실을 상기하며 보고했다.
"미친새끼들 아이가. 머 어디가 어떻게 안되는데? 사진 있나?"
공구당 하나씩 있는 올림푸스 디카를 꺼내 옹이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아이고 또라이 걸삐들 지적하는 놈이나 뻐팅기는 놈이나.. 아라따."
하시고는 협력사 이소장님에게 전화를 걸으시더니
"마 소장님요 와 재검측 나온거 안한다캅니까? 예에? 아니 우리 김기사가 그러는데 데나우시 수정 않고 그냥 갔다캄서요? 네? 뭐하자는겁니까? 예? 사무실로 지금 당장 오이소!"
잠시 후 토목업체 이소장님과 같이 검측했던 치장이 들어왔다.
공사팀 회의 테이블에 다소곳이 앉아서 팀장님의 다른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소장님요 와 안한다캅니까 네?"
"아니 안한다는게 아니라 ㅎㅎ 작업팀이 계속 야근하고 오늘 좀 지쳤나봅니다. 할거에요."
"토류판 옹이 난거 쓰게 되있슴까 아임까?"
"안되죠..."
"근데 와그라는데예?"
이소장은 습관적으로 눈알을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이며 사무실을 살피며 말했다.
"부장님 뭐 핑계는 아닙니다만 맨날 검측할 때 사소한것까지 딴지걸어서 저희도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제가 우리 차장에게도 주의를 줬으니 앞으로 그런 일 없을겁니다. 다만 시공사쪽에서도 원활한 검측이 될 수 있게 함 도와주십쇼."
팀장은 묵묵히 듣더니 알았다고 자기도 사정은 다 아는데 어쩔 수 없지않냐. 앞으로 김기사가 왔으니 더 밀착관리 하겠다 하고는 내일 오전 재검측 받을 수 있게 조치한다는 확답을 받고 보냈다.
보내시고선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며 뭘 하셨고 잠깐의 폭풍이 지나간 것마냥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침 회의가 끝나고 박과장이 회의실에서 나왔고 나오자마자 오늘 검측 잘 받았냐를 젤 첨 물어보셨다.
난 쭈삣쭈삣 다가가 탕비실로 가시죠.. 하고는 박과장과 같이 탕비실로 갔다.
자초지종을 다 묵묵히 듣더니 박과장은 나와같이 현장을 가 보잰다.
앞장서서 현장을 가 옹이가 생긴 토류판을 보여주고 좀 더 디테일하게 상황설명을 했다.
띠장 연결부위 용접상태와 설치상태를 자세히 보더니 나를 데리고 협력사 사무실로 갔다.
"소장님 하.. 나 이거. 지금 장난하시는거에요?"
작업반장을 불러 얘기하던 이소장이 아이구 어서오십쑈 하고 환영했지만 금새 분위기를 파악했다.
"왜, 내가 검측 제대로 뛰어줘? 우리 김기사 신입이라고 얼타기 하는거야 뭐야? 김차장 감리한테 뭐라하고 안하겠다고 했다메? 니가 공정 책임 질꺼야?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차장은 핑계를 대려다가 박과장 얼굴을 보고선 입을 다물었고 모두가 숨도 안쉬고 박과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람도 없고 바빠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고 자재검수도 대충 했었는데 제대로 해줘? 김반장님 옹이 있으면 되요 안되요?"
김반장은 아니 옹이가 있음 안되지 근데 너무 꼬투리를 잡고 그러니 나도 힘들제.. 하고 박과장을 쳐다봤다.
"나도 알아 응? 감리 또라이 병신이란거. 근데 어쩔꺼요? 그럼 매사 감리랑 투닥거리면서 질질 끌꺼요? 글구 한달전에 임기사가 검측 받을 때 감리가 옹이 지적 했어 안했어? 그 때 지적받고 수정했으면 담부턴 그런지적 안나오게 해야할거 아니오!"
다들 암말도 없이 각자 시선을 허공에 뒀고 박과장은 다시 차분히 말했다.
"소장님 사정은 아는데 내 매번 이런걸로 재검측 받고 하는거 힘든거 알아요. 띠장 설치는 잘 해놨더만 왜 사소한걸로 자꾸 트집 잡히고 그래. 반장님한테도 이러는거 미안해요. 나도 참 중간에서 힘들다. 앞으로는 토류판 선별 잘 좀 하시고 요령껏 하자구요 네? 지금 바로 조치하고 재검측 내일 아침 일찍 받을 수 있게 해줘요. 부탁합니다."
반장은 까짓꺼 박과장 부탁이니 내 한다면서 작업지시 하러 나갔고 박과장도 이소장에게 좀 큰 소리를 내서 미안하다 했다.
그리고선 나를 데리고 감리실로 갔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토목이사 앞으로 갔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ㅎㅎ 요즘 업체선정하느라 회의 참석하고 그래서 좀 바쁘네요. 오늘 재검측 나왔다는데 왜 그러죠? 김기사가 설명해줬는데 좀 자세히 얘기를 듣고 싶어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토목이사는 옹이로 인해 흙막이벽이 붕괴된 사례가 있다면서 입에 침을 튀면서까지 설명을 했고 박과장은 추임새만 넣으며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선 말했다.
"제가 보니까 일곱군데는 좀 그렇고 한 세군데는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 나머지는 H빔에 가려있거나 해서 괜찮을거 같아요. 세개만 교체하겠습니다. 안그래도 얘기듣고 업체가서 혼쭐을 내고 왔습니다."
혼쭐을 냈다는 말에 이사는 눈이 번뜩이며 음... 하고는
"박과장이 그리 봤다면 뭐 나도 일부는 동의함세. 왠만하면 전체 다 교체를 해야겠지만 일단 세군데 교체하고 내일 재검측 시 같이 봅세. 내일 검측에는 박과장이 나오는가?"
박과장은 자기가 직접 하겠노라.. 하고 세군데만 교체하는걸로 확답받고는 감리실을 나와서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김반장과 작업팀은 공팔을 한대 끌고와서 토류판을 교체 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박과장은 다가가서 이거이거이거 세개만 교체하라고 했다.
역시 박과장님이여! 하고 반장은 치켜세워주었고 박과장은 띠장 용접 잘했다 앞으로 이렇게만 해달라 부탁 하고는 어스앵커 작업량을 확인하고는 다시 사무실로 갔다.
가면서 박과장이 말했다.
"원래 현장에 처음오면 그래. 기싸움이라고나 할까. 좀 의미는 없지만 아무래도 거친 작업환경이다보니 그런게 좀 있어. 그리고 너가 해결 못했는걸 내가 해결해줬다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찾지 말고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해라."
나에겐 박과장의 뒷모습이 거대한 산 같았고 마치 무엇이든 다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갓 위의 갓 같이 보였다.
그날 저녁 박과장은 일이 있다고 조금 일찍 일곱시쯤(?) 퇴근을 했고 이공구 이과장은 주변을 쓱 보더니
"김기사 쏘주먹으러 갈꺼니까 준비해라"
"네? 오늘 야간작업이 있습니다..."
"그거 임기사보고 보라고 하고 가자."
아.. 오늘 늦게라도 여자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어쩌지..
신입인 주제에 과장이 얘기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밖으로 나가서 여자친구한테 전화했다.
사정이 있어서 급한 저녁식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자기 이미 약속장소에 와서 쇼핑하고 있는데 오빠는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냐고 닥달한다.
알았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다시 이과장에게 갔다.
"과장님 사실.. 오늘 제가 여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잘됐네. 내가 맛있는 고기 사줄테니까 오라그래. 같이 함 보자. 원래 여자친구는 직장 상사에게 소개시켜주고 그러는거야!"
알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과장님이 너 보고 싶어한다고 고기사준다고.. 오늘 우리 다 같이 보면 안될까? 라고 은근슬적 제안을 했고 여자찬구는 이참에 회사 동료들 얼굴이나 보고 점수좀 따야겠다는 생각인지 알겠다고 했다.
근데 그게 헤어지게되는 아픈 추억이 될지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