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가다 8
채대리에게 인수인계 받는 절차에 들어갔다.
나름 꼼꼼하게 기록 및 정리를 해놨지만 자기만 알아볼 수 있게 정리를 해논터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채대리와 탕비실에서 잠시 커피 한잔을 했다.
"내가 너 공채 후배인데 안챙겨서 섭섭했어?"
"아니오... 사실 다른 동기들은 공채 선배들이 챙겨준다고 해서 부러웠는데 뭐 전 박과장님하고 임기사가 잘 해줘서 그런건 없었습니다."
"그래. 나도 내 코가 석자라 그러고 싶어도 못 그래서 미안타. 글구 너도 알다시피 이공구 분위기도 그렇고.."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자리도 이공구로 옮겼고 이과장은 채대리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낀 것 같았다. 폭언의 횟수가 하루에 두어번에서 시도때도 없이 늘었으며 옆에서 듣고 있자니 이과장이 틀린 말 하는건 없지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늘 말이 곱다고.. 좀 말을 막 하는 성격이었다.
채대리는 전 현장에서 결혼을 하고 이제 막 돌 지난 아기가 있었는데 전 현장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소장님이 특별히 데려왔다고 들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이과장의 폭언과 강압적인 일처리에 환멸을 느끼고 몰래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대령출신 동대장을 하고 계시고 학교 다닐 때 건축기사와 정보처리기사를 따 두어 공부하는데 자신감이 있었다고 한다. 백점 만점에 십팔점인가 한 가산점을 등에 업고 시작한 공부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같이 현장에서 시달리고 집에가면 육아를 해야 하고 그나마 다행인건 이과장은 팀장님 퇴근하시는 일곱시 쯤이면 자기도 슥 사라져서 그 이후부터는 공부를 틈틈히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건설회사 들어오기 전 공무원에 생각이 있었다고 말은 하지만 자료 정리한 거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검측 요청서는 바인더에 정리된게 아니라 일부는 박스안에 그리고 일부는 책상위에 나뒹굴고 있었고 지금에야 스캔해서 보관하곤 하지만 당시에는 사무실 한켠에 캐비넷이 쭉 있어서 문서보관을 하곤 했다.
필기만 합격한 상태임을 뒤늦게 알았지만 채대리는 면접 떨어지겠어? 라는 자신감으로 사표를 던졌고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가산점 없이도 합격 커트라인을 넘었고 그 해 일등인가 이등으로 합격해서 여러군데 중 한군데를 골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채대리와 함께 현장을 보고 검측도 같이 받고 이공구 토목 업체도 소개 받았다.
이공구는 최소장님이신데 말수도 없으시고 나이도 많아보였다.
"이분은 실행소장님이셔. 그래서 말 잘 안들어.."
채대리가 사무실로 올라가며 나에게 말했다.
실행소장이 뭐지? 궁금함에 물어보니 답해준다.
"쉽게말해 하도에 재하도 개념이라 보면 돼. 회사가 수주를 하고 몇프로를 떼고 이 소장님이 그 공사금액 안에서 공사하고 남는돈은 가져가는 구조지."
이제 갓 삼개월여 지난 나는 네.. 하고 듣고만 있었고 나중에서야 그 차이를 알게 됐다.
이과장은 채대리에게 업무 인수인계 똑바로 하고 가라고 으름장을 놨고 채대리는 그 와중에도 예의바르게? 꼬박 꼬박 네 알겠습니다를 하고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공사팀장님은 채대리가 가는게 좀 서운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채대리가 팀장님의 학교 후배였던 것 같다.
따로 두어번 술자리를 가지셨고 채대리는 팀장님께 많이 미안해했다.
채대리가 그만두기 전 주에 소장님은 채대리 송별회 겸 직원 전체회식을 하자고 했고 모두들 채대리가 가서 아쉽다고 이별주를 한잔씩 했다.
채대리는 술이 쎄보이진 않았지만 넙죽 넙죽 주는대로 받아먹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임마 이과장! 너 임마 애를 어떻게 했길래 그만둔다는거야? 니가 똑바로 안하니까 가는거 아냐?"
소장님은 농담조로 이과장을 향해 한마디 툭 던졌는데 이과장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자기가 그래도 이만큼 지도했으니 채대리가 일 많이 배울 수 있었다라고 항변을 했다.
다 같이 웃자고 던진 농담에 이과장이 진지하게 답변하니 갑분싸가 되어 조용해졌다.
"소장님 저 여기 있는 동안에 이과장에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과장 덕분에 토목공사도 잘 배우고 특히 이과장 뿐만 아니라 저희 팀장님과 일공구 건축 직원들에게도 많이 배웠습니다. 먼저 떠나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국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채대리는 약간 꼬부랑 소리로 그 썰렁한 분위기를 깨버렸고 다 같이 건배를 외치며 채대리 축하해! 임마 높은사람 되서 나 만나면 잘해줘!! 등등 다시 화기애애하게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과장은 얼굴이 구겨지며 담배한대를 피러 쓱 나갔고 채대리는 내 옆자리로 왔다.
박과장이 채대리가 이렇게 술 많이 먹는거 첨 본다면서 속도 조절하라했고 이 때 채대리가 불쑥 말 했다.
"과장님... 우리 김기사 요즘 연애전선에 빨간불 들어온거 아세요?..딸꾹."
박과장은 이놈 많이 취했네.. 라며 니 걱정이나 하지 김기사 사생활은 뭐하러 얘기하느냐 했다.
"아니 저번에 과장님 일찍 퇴근했을 때.. 딸꾹.. 이과장님이랑 셋이 술 한잔 먹었는데 그 때 이과장님이 모라한지 아십니까? 딸꾹.. 크..첨보는 김기사 여자친구보고 노가다는 바람피는거 다 이해해줘야 한다면서 딸꾹.. 그래서 막 여자친구 울면서 나가고 그랬어요.. 딸꾹.."
옆에서 듣던 임기사가 미친놈.. 하고 조용히 말했고 박과장은 나보고 그러냐고 물었다.
"아.. 하핫! 네 뭐 그랬는데 여자친구가 맘이 넓어서 다 이해한데요. 저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박과장은 그런 말 한거 자체가 정말 잘못된거고 공과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자친구에게 그 일은 미안하다고 계속 말하고 앞으로 너가 그런 사람 아니란 확신을 주게끔 처신을 잘 하라 했다.
대충 분위기를 수습하고 화장실 간다고 나왔다.
아.. 뭐하고 있을까. 연락 안한지 한달이 넘어가는 같은데.. 보고싶다.
술김에 여자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아.. 나야.. 잘 지내지...?"
"응.. 전화 왜 했어?"
가을이 곧 시작될건데 벌써부터 찬바람이 분다.
그냥 잘 지내나 안부전화 했다 둘러대고 우리 언제쯤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었다.
"글쎄...."
침묵이 길어졌다. 난 짧은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했다.
마침 담배를 피고 오던 이과장이 나를 발견하고는 김기사! 누구랑 전화하냐? 라며 다가왔다.
"아 네 여자친구랑 통화중입니다."
"아 저번에 이쁜 아가씨? 제수씨!! 담에 꼭 같이 한잔 더 해요!!"
이과장이 눈치없이 옆에서 한마디 지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혹시 술마셔? 저번에 그 사람이랑?"
단체회식이고 저번에 봤던 채대리가 일을 그만두어 송별회 한다고 했다.
여자친구는 한숨을 푹 쉬고는
"오빠.. 나 이제 오빠 못 믿을 것 같아. 저번에 그 과장님이랑은 절대 술 안먹는다고 했잖아. 질 나쁜 사람이라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아니 이건 회식이고 저 사람 담배피다가 나 보고 취해서 저런거라고 말했지만..
지금 이 상황도 코메디 같고 내가 지금 뭐하는지도 모르겠다.
여자친구는 전화를 끊자고 했고 내가 먼저 연락할때까지 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응...
안녕 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으며 이과장이 진짜 너무 싫고 미웠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은척 꼴에 남자라고 어울렸고 그리고 회식은 끝났다.
팀장님은 아쉬은지 노래방을 가자고 했고 공사팀 직원들만 따로 노래방을 가서 맥주와 소주를 시켰다.
"팀장니임! 수류탄주 아십니까??"
조금 취한듯이 보인 임기사가 말했다.
모른다고 하자 밖에 나가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가위를 들고왔다.
캔맥주 옆구리를 콕 찍더니 바닥에 맥주를 흘리고는 그 구멍으로 소주를 들이부었다.
"제가 시범 보이겠습니다!!"
캔맥주 구멍 뚫린 부분을 위로 향하게 한 후 캔따게를 딱! 딴 후 입으로 바로 가져다 들이대고 쭉 들이켰다.
얼라? 한 이초에서 삼초 사이에 캔맥주는 텅텅 비었고 순식간에 원샷을 했다.
우와~~~ 이야 임기사!! 하고 다들 웃고 즐거워했고 임기사가 말했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수류탄주란겁니다! 캔 한번 따면 이초내로 목구멍으로 쫘아아악 흘러 내려가는 요즘 시간없고 불철주야 바쁘신 공무원 나리들께서 짧은 시간에 뻑가는 방법으로 즐겨 마신다 합니다!! 우리 채대리님도 이제 곧 그 대열에 들어서는데 가시기 전에 배우고 가시죠!!"
임기사는 서둘러 다음 캔으로 준비했고 채대리가 마셨고 또다시 만들어 팀장님께 드렸다.
"하 임마 난 또 뭐라고. 난 옛날 리비아 있을때 싸데기로 다 마스터 했으~~~!"
*싸데기는 중동지방에서 몰래 만들어먹는 밀주
그렇게 하나씩 돌려마셨고 임기사가 건네준 캔맥주를 들이키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한번에 쑥 빨려 내려갔다.
우와.. 이게 그.. 공기구멍이 있어서 그런건가 뭐 이리 빠르게 먹히지?
팀장님이 선곡을 하고는 애수를 멋드러지게 부르셨다. 노래를 잘 못하는 나는 신해철의 여름 이야기같은 옛날 노래를 불렀는데 다들 취해서 템버린 치고 떼창을 했다.
수류탄주 때문인가 점점 기억이 흐릿해지더니 내가 어딨는지 여기가 어딘지 구분도 안갈만큼 어지러워지며 정신을 잃고 쇼파위에 누웠다.
"김기사님 일어나세요!!! 아유 등치에 비해 약하시네!!"
임기사가 뺨을 톡톡 쳐가며 나를 깨웠고 노래방에는 다 나가고 임기사랑 둘이 남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 임기사가 다들 방금 전에 나갔다고 팀장님은 먼저 가시고 박과장님도 집에서 전화가 와서 먼저 갔다고 말했다.
비틀거리며 나왔더니 이과장과 채대리가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마주보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얘기 중이었다.
담배 한대피며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임기사는 자기는 먼저 간다고 김기사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고 이과장과 채대리에게 인사를 하곤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둘이는 잠시 얼 싸안고 등을 두드리며 뭐라뭐라 하더니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이과장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김기사 임마 너 뭐해? 따라와 임마 너 이공구 아냐?"
네! 하고 가다가 욱 하고 오바이트가 올라와 전신주를 붙잡고 게워냈다.
으 어지러... 이과장과 채대리는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고 아 그냥 가버릴까 하다가 그냥 가면 또 욕먹을 것 같아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둘은 어느 건물 입구에 다달았고 들어가기 전 이과장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김기사 너 이런데 와봤냐?"
아니 이정도로 취했으면 집에 가야지 또 뭔 술이야.. 하고 건물을 올려다보는데 네온싸인 하나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XX안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