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가다 11
이과장은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사람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A건설사에 입사하여 일을 시작하고 운이 나빠서인지 처음부터 아파트 마감 현장에 발령받아 계속 마감현장으로만 전전긍긍하다가 이래서 어떻게 기술자가 되겠는가라는 생각에 항상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신규 현장에 보내달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자기 말에 의하면 초에이스였다고 한다.
사실 일처리를 보면 두뇌회전은 엄청 빠르고 업체들 다루는 스킬도 뛰어났다.
대리를 달고나서 경력 사년을 채우고 바로 기술사 공부를 시작해서 삼개월만에 기술사를 취득했다고 했다.
당시 기술사 시험지는 일반 갱지 비슷한 줄만 거져있는 형태였고 자기는 독학으로 가상의 선을 그어 넘버링을 들여쓰기하여 보기좋은 답안지가 되도록 했으며 지금은 학원에서 늘상 가르치는 레이아웃에 대해서도 고려해서 꽤 고득점으로 필기를 합격했다고 들었다.
술먹을때마다 전 회사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어 보여줬고 명함에는 이XX 대리 / 건축시공기술사 라고 적혀있었고 그 명함을 애지중지 했다.
보통의 술자리에서는 자기의 화려한? 경력에 대해서 입에 거품이 물도록 자화자찬을 했으며 또한 자기계발에 게을리 하지 말고 항상 공부하기를 주문했다.
본인 스스로가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 없이 독학으로 일을 배우고 했기에 부하직원을 가르치는 능력은 떨어졌지만 남들을 자기기준에 맞춰 못 따라오면 힐난과 질책이 뒤따랐다.
기술사를 취득하고 계속 마감현장만 돌리는 회사가 얄미워 이직을 했고 이직 후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주변 평판을 들어봐도 이과장처럼 카리스마 있게 일한 사람은 없다는 평이 많을 정도로 일에 대한 칭찬은 자자했지만 음주 그리고 식탐에 대해서는 다들 알 정도로 유명했다.
윗사람들에게도 잘해서 팀장님도 개인의 성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눈감아주는 편이었고 뒤늦게 시작한 이공구지만 군말없이 진척률을 빼고 있는 이과장을 두둔해주기도 했다.
이과장의 건강상태는 매우 나빠보였다. 잔기침을 계속 했으며 식은땀도 자주 흘리고 활동적인 행동보다는 주로 앉아있다보니 자연스레 배가 나오고 비만형으로 변해가고 있던 것 같다.
뒤늦게 이과장이 다른 현장으로 전배를 가고 박과장에게 들은거지만 이과장의 집안도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애가 둘 있는데 하나는 좀 아프고 부모님도 편찮으셔서 소득에 대한 지출이 꽤 컸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고 외제차의 스펙을 그 좋은 머리로 줄줄줄 꿰고 있었지만 몰고 다니는 차는 문콕이 많고 가끔 주행 중 멈추던 크레도스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똑게(똑똑하고 게으르고) 타입의 리더였고 따라서 부하직원의 무능함을 참지 못한 그런 타입이었다.
나는 멍하니 아무생각없이 현장으로 출퇴근을 반복했고 일도 모르겠고 협력업체 관리가 되질 않으니 생기도 없고 의지도 없어졌다.
이과장에게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혼나는 몫은 채대리에서 내게로 전이되었으며 처음에는 울컥 하다가도 이과장이 일적으로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이과장의 지적질에 숨도 쉴 수도 없고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그러한 것을 왜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 라는 아쉬움과 분노가 있었고 이과장은 그 과정이 배움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숨막히게 지내던 어느 날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매사에 지쳐있던 나는 시큰둥하게 받았고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지만 그 기쁨을 표현하기엔 너무 지쳤기도 했고 연애세포가 다 죽은 듯 했다.
여자친구는 잘 지내냐고 물었고 난 하루하루 내가 왜 건설회사로 왔는지 후회만 한다고 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사무실을 갔어도 내 시간을 못 냈을거다.
"나 많이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자."
여자친구가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흘렀네.
"나 말고 사귀는 사람 생겼어?"
여자친구는 담담하게 응 이라고 말했고 왜 그러는지 묻고는 싶지만 사나이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언제부터 사귄거야?"
"... 만난지는 얼마 안됐어."
한쪽의 생각이 정리가 됐는데 나머지 다른 한쪽은 정리는 커녕 앞으로 잘 될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나랑 다시 만나줄 수 있니"
여자친구는 단호하게 없다라고 대답했고 그렇게 수화기 넘어 침묵의 시간은 길어져갔다.
자기는 오빠가 취직하고 하루종일 불안하고 울기도 많이 울고 했단다. 어느날 너무 그런게 싫고 해서.. 오빠도 실망하게끔 행동하고.. 해서 헤어지기로 마음 먹었다 했다. 오래전에.
"그래. 나같은 놈이랑 만나줘서 고마웠어."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는 하지만 이미 마음 한 구석은 큰 구멍이 뚫려있다.
행복하게 잘 지내라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예상은 했고 이렇게 될 거라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막상 나에게 현실이 되어 들이치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멍하니 있는데 임기사가 지나간다.
"임기사님 저 담배 한대만 주세요."
"으에?? 담배 안피잖아요!"
담배 한대를 얻어 입에 물고는 임기사가 라이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불을 붙였다.
오년만인가.. 다시 입에 담배를 물게 된게.
머리가 핑 돌며 기분좋은 필링이 몸 깊숙히 구석구석 퍼져갔다.
여자친구가 담배를 싫어해서 끊었었지. 사귀기 전부터 너에게 잘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도 했었지.
한번 끊은 담배는 갑절로 피게되는 것인지 하루에 한갑 반이 넘게 피워대는 골초가 되었고 어차피 이리된거 자포자기 심정으로 회사를 다녔다.
입에는 거친 쌍욕이 늘 붙어있었으며 이과장과 함께 둘이서 술을 하는 시간도 늘었다.
아니 거의 매일 같이 먹었던 것 같다.
계속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귀에 익어 이쯤이면 찌개를 시키고 이쯤이면 취해서 나에게 욕을 하고 이쯤이면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고 술집을 나선다라는 루틴이 생길만큼 익숙해졌고 나도 여자친구를 잊으려 매일 술로 달랬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여자친구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고 나 말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해 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분노가 가득 차기도 하고 허공에 욕지꺼리를 날리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친구가 알몸이 되어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몸을 허락하고 나즈막한 신음 소리를 내는 장면이 떠올라 화가났다.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개천가 자전거길을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전력질주를 해도 이 분노가 그리고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집에서는 여자친구와 헤어짐을 듣고는 어쩌다가 그랬냐고 나를 뭐라했고 특히 아버지는 나를 나무라셨다. 참한 아가씨하고 왜 헤어졌냐고.
나의 부족함과 배려하지 못한 그리고 여자친구는 한없이 이해해줄꺼라는 착각속에 나 혼자 그리 살다가 헤어지게 된거고 그 누구를 원망하랴.
이과장은 여자친구와의 결별에 아쉬워했지만서도 자기랑 늘 술을 마셔주는 동무가 생긴 것에 내심 기뻐했고 조금씩 나에게 맘을 열어 일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일이라도 한번 질리도록 해보자는 마음에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현장을 다니며 체크하고 이과장에게 보고했고 이과장은 이런 나를 자기 식구로 인정해주며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업체는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으며 이과장의 눈과 귀가 되어 부지런히 현장을 누비는 나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던 어느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