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가다 17
영화관에 도착해서 팝콘과 콜라를 사고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인턴 김기사는 영화는 자기가 보여주리다 하고 예매를 했는데 나비효과 라는 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슬쩍 슬쩍 옆모습을 쳐다봤는데 미동도 안하고 영화만 본다.
나는 아까의 그 팔꿈치 감촉이 떠오르고 혹시 영화보는 내내 내 손이라도 잡지 않을까 해서 슬쩍 팔걸이 콜라를 치우고 손을 얹어놨지만 인턴 김기사는 아랑곳 않고 영화만 집중해서 보고 있다.
하.. 이거 뭐냐.
가끔 화면이 밝아지면 슬쩍 눈을 돌려 그녀의 검은색 스타킹을 바라봤고 나는 욕정의 동물인지 아니면 같은회사를 다니는 멋진 선배인지 그 경계에서 오락가락한 채 영화를 봤고 그렇게 엔딩 크레딧은 올라갔다.
지금도 그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기억도 안난다. 뭔가 시간여행같은걸로 과거를 돌리고 그랬던 것 같은데..
영화관을 나오며 인턴 김기사가 묻는다.
"선배 여기 뭐 맛집 있나요? 전 강북쪽을 와 본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겠네요."
그녀를 데리고 학창시절부터 자주가던 명동골목 구석에 있는 허름한 호남백반집으로 데려갔다.
왠지 격식을 차리고 멋진 곳에 가면 화려한 조명에 내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이 경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내 맘을.
할머니가 맞이해주며 아이구 오랜만에 왔네!! 하고 약간 구석진 곳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드럼통에 커다란 은쟁반을 얹은 것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녀의 외투를 건네받아 비닐에 싸서 의자뚜껑을 열고 넣어뒀다.
인턴 김기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기는 명동에 이런곳이 있는 줄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항상 번잡하고 따닥따닥 붙어있는 옷가게와 상점들만 지나쳐서 그런지 이런곳이 신기하고 재밌는 모양이다.
주인집 할머니는 뭐 먹을껴? 하고 물으며 뭔가를 말하고 싶으셨는지 잠시 둘을 쳐다봤다.
전 여자친구랑도 가끔 오던 곳이라 내 앞에 앉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헷갈렸을 것이고 지극히 상업적 마인드로 보자면 소위 단골이라는 손님에게 더 자주오게끔 친근한 느낌을 줘야 하지만 내 앞에 앉은 대상이 할머니 기억속의 그 대상과 매치가 되지 않아 주저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베테랑 답게 처자가 참 곱네.. 라는 멘트로 재치있게 넘기셨고 난 정식 두개랑 연탄 불고기 하나 주세요! 그리고 막걸리도 하나요 라고 주문했다.
인턴 김기사는 곱다는 표현이 기분 좋은지 베시시 웃었고 할머니는 막걸리 안흔든거지? 라고 말씀하시며 주방으로 가셨다.
그래.. 나를 기억하고 계시지만 내 앞에 앉은 김기사는 모르셔서 재치있게 얘기를 하셨구나.
뭐 사실대로 얘기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인턴 김기사는 조곤조곤 영화 얘기를 하며 나온 막걸리를 조심스럽게 글라스에 따랐고 왜 막거리는 안흔들어 먹냐고 물었다.
"글쎄.. 누룩이라고 해야 하나. 침전물을 섞어서 안마시니 다음 날 숙취도 없고 좋더라고."
우린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덜 혼탁한 막걸리를 짠 하며 부딪히고 한잔 했고 바람이 부는 밖의 온도만큼 차가운 막걸리는 우리의 뜨듯한 몸을 시나브로 얼리며 그리곤 다시 따뜻해졌다.
밥이 나왔고 인턴 김기사는 맛나게 먹었다. 연탄 불고기는 여전히 맛있었고 밥이 맛있는만큼 막걸리 병 수도 늘어만 갔다.
인턴 김기사는 자긴 막걸리는 잘 안마시는데 오늘 선배랑 이렇게 둘이 마시니 좋네요 하며 꿀떡꿀떡 잘 마셨고 취해서 그런가.. 인턴 김기사의 목은 유난히 하얬고 딱 붙는 원피스로 숨겨진 인턴 김기사의 몸매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선배는 아직 전 여자친구를 못 잊어요?"
어느정도 취기가 올랐는지 과감하게 돌격했다.
"응..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서로 시간도 안맞고 해서.. 헤어지게 되었어."
인턴 김기사는 자꾸 어떻게 헤어졌는지 캐물었고 그런 사적인 애기는 막 하는거 아니라며 꼴에 근엄한 선배의 모습으로 박과장을 흉내냈다.
"나는요.."
인턴 김기사가 자기 얘기를 한다.
자기는 여고를 나와 대학교에 입학하고부터 끊임없이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자기가 사귀다가 차버려서 군대를 보낸 남자친구가 한트럭은 될거라며 깔깔거렸고 CC를 하다가 헤어진 후의 끝없는 집착에 학교 밖으로 눈을 돌렸댄다.
근데 하나같이 다 사귀자고 하면 섹스를 요구했고 내가 너무 문란하게 생겼나 아님 원래 연애가 그런건가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차버린 남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학년 때 교회에서 만난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랑 최근까지도 만났고 이 오빠다 싶어서 몸도 허락하고 순종적으로 하자는대로 다 하며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양다리였고 인턴으로 입사하기 전 주에 헤어졌다고 했다.
남자라면 헤어지고 나서 고통스러워해야 하는거 아니냐 물었다.
"글쎄.. 남자 여자는 둘의 온도차가 있으니 그럴수도 있지만 항상 다 그런건 아냐."
혹시 인턴 김기사가 나에게 너도 쉽게 사랑이 식는 타입인지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케바케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요... 그 오빠가 잊혀지지 않아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도 이별의 고통을 겪고 있구나.
그리곤 내가 듬직하고 멋져보여서 좋단다. 첫 인상부터가 호감이 갔고 다른 현장 솔로들과 다르게 자기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그렇게 땡기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선배 그.. 술먹고 이차를 갔는데 그냥 잠만자고 나왔다면서요?"
아나 이런. 왜 경쟁자들은 이런걸로 싹을 자르려 하는가.
"그건 니가 어떻게 알아?"
뭐 술자리에서 들었다 하면서 오히려 그 점이 더 멋있어보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는 요즘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대학생때부터 계속 남자친구가 있어왔고 그리고 바로 전 남자친구는 결혼까지 생각할만큼 사랑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두달이 지날때까지 마음 정리를 못해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었다. 일터에서 만난 나를 보고는 멋지고 동경하고 듬직한 사람이라 좋았다. 마침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솔로인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대쉬를 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한다고 티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사무적으로 대하니 그게 그렇게 더 멋질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사랑은 아닌 것 같고 좋아하는 감정으로 만나보고 싶다라고 얘기했다.
묵묵히 말을 듣던 난
"그래 니 맘이 뭔지는 알겠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시련의 아픔을 겪고 있으니 이 감정이 어느정도 정리가 됐을 때 서로 만나보는걸로 하자."
라며 정리를 해주었다.
인턴 김기사는 알겠다 무슨 뜻인지 라며 헤헤 웃었고 이상하게 선배한테는 속마음을 다 털어놔도 될 그런 듬직한 남자네요 라고 했다.
멋진척 하지말고 사귀자고 돌격할걸 그랬나.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도 아직 여자친구가 돌아올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둘이 사귀게 됐을 때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보다는 과거를 떠올리며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았다.
대충 마무리를 하고 나왔다.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 했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명동역으로 걸어가며 인턴 김기사는 다시 나에게 팔짱을 꼈다.
불과 몇달전만 해도 전 여자친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다녔었지.
키도 늘씬하고 매력적인 얼굴에 몸매빵빵으로 지나가는 모든 남자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것에 알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되어있었지.
자연스레 연인처럼 걷다가 명동역에 다다랐다.
"선배 안녕히 가세요. 저녁 잘 먹었습니다. 내일도 활기차게 일해요!"
라며 밝게 웃고는 데려다주지 말라면서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저 애는 나를 왜 보자고 한걸까.
사귀자고 했어야 하나 아님 시간을 갖고 서로 알아가자고 한 것이 올바른 것이었나...
우두커니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곤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 출근하니 인턴 김기사는 여전히 다른날과 같이 싹싹하고 활발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별의 아픔을 숨기고 저리 활발하게 다니는 것을 보니 가슴 한편으로는 짠하면서도 참 대단한 아이다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로운 공구장이 왔다.
박차장.. 거무스름한 피부에 차가운 얼굴이었다.
본사 사업관리팀에 있다가 왔다고 하는데 내가 대기할 때 날 봤을수도 있는데.. 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현장의 높은 사람들은 다 아는지 소장님부터 공사팀장님까지 반갑게 맞이하여줬고 딱딱한 말투는 사무적이지만 엄청 카리스마가 있었다.
"응 그래 김기사. 니가 일 다한다메?"
아니라고 옆에 박과장이 많이 도와쥐서 그렇다 답했다.
박차장은 며칠 적응하더니 본색을 드러내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다른점은 업체를 쥐잡듯이 잡는다는 것.
숨도 못쉬게 몰아붙이고는 자기 방식대로 다시 배열했다.
그리고 업체 사장들하고도 친한지 뭔가 잘 안풀리면 바로 사장들에게 전화를 했다.
업무는 모든것이 박차장 중심으로 돌아갔고 나는 다시 그저 힘없는 김기사로 다시 돌아갔다.
검측하고 시키는대로 확인하고 현장에서 살고.
나의 생각과 의지는 박차장에게는 필요 없었고 무언가 현장에서 들은 정보로 이렇게 하는게 어떻겠냐 건의하면 그건 니가 고민할건 아니고 주어진 일이나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하세요 라는 비아냥이 되돌아왔다.
그래.. 내가 그 동안 혼자 뭘 하느라 힘들었지. 그냥 시키는 것대로 열심히 부지런하게 하면 그게 기사지..
본연의 업무로 돌아왔지만 왠지 그 동안 내가 추진해왔던 그리고 협의했던 일들이 싸그리 무시당하는 것 같았고 박차장은 강한 지배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며 나는 그의 부품이 된 채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썩 마땅치 않았다.
이과장은 머리도 좋지만 게을렀다. 그런데 박차장은 부지런하기까지 했다.
매일 회의를 하고 정해진 시간에 현장 패트롤을 하며 작업지시를 하고 업무를 추진해갔다.
어찌보면 능동적인 그리고 활발한 공사팀장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벌려놨던 일들은 박차장 한마디에 모든 것이 수정되었고 이제 내가 상대하는 대화레벨은 업체 직영반장 그리고 각 공종별 과차장들로 다시 내려갔다.
그나마 나의 발언권은 힘이 없어졌고 무언가를 업무를 추진하려 하면 박차장에게 보고는 된거냐고 묻고는 그렇다면 하고 아니라면 일단 재껴두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
인턴 김기사는 새로운 박차장에게 별도로 업무지시를 받고 움직였으며 내가 뭔가를 하라고 지시하는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공사팀은 박차장 체제로 전환되었다. 일공구 박과장도 새로운 박차장 스타일에 금새 적응하고는 보조를 맞추고 있었고 어찌보면 나 홀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나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점점 조그매져갔다.
기초 상부근도 완료되고 라쓰작업도 완료됐다.
검측받기 전 하부 청소를 해야한다.
업체 과장에게 청소를 지시했지만 지금 당장 사람이 없다고 한다. 업체 직영반장에게 찾아갔지만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직영반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박차장님 시킨일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난다 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검측 빵꾸내는건 싫고 박차장에게 사정을 얘기하는건 더 싫다.
검측용으로 철근을 열어둔 개구부에 들어가서 빵봉지를 줍고 캔을 줏었다.
각종 담배꽁초들은 철근 삼따블 안에 들어가 잘 눈에 띄진 않지만 희안하게도 상부근 위에서는 귀신같이 하얀 꽁초가 보였다.
아이씨 담배피지 말라니까 말 드럽게 안듣네..
꿍시렁대며 쓰레기를 줍고 봉지에 담던 나는 갑자기 이 노가다에 대해서 환멸이 올라왔다.
아니 내가 왜! 멀쩡한 대학교 나와서 이렇게 쓰레기를 줍고있나! 불과 몇주전만 해도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고 일하고 있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지만 더 악이 생겼다.
익숙치 않은 철근 위를 뒤뚱뒤뚱 걸으며 면장갑을 낀 나의 손은 바쁘게 움직여 쓰레기를 담았고 무전이 날라왔다.
"김기사 송신해라."
박차장이었다.
"예 말씀하십쇼!"
"너 지금 뭐하냐..?"
박차장이 상부근 위에서 싸늘하게 날 쳐다보며 무전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