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미아리 사창가 여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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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미아리 사창가 여자들의 이야기

익명_MTEyLjI1 0 1025 0
재밌어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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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케이블tv에서 몇년전 영화였던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조제현씨가 출연했고 꽤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사창가를 배경으로 다소 충격적이었던 그 영화

하지만 나에게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화이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돈 몇만원으로 욕정을 해소하는…

가장 밑바닥 천한 여자들이 모여드는 사창가

나에게는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가장 잊을 수 없었던 내 기억 속에 어느 여름

항상 머리속에 마음속에 그 때의 일들이 있었지만

그저 가끔 주위 몇몇 사람들에게 술자리 안주 삼아 이야기로만 들려주었던 그 때의 기억

“나쁜 남자” 영화속의 사창가 풍경을 보며 나는 영화보다는

나의 경험담을 글로 옮겨 써봐야겠다는 생각과 귀찮다는 생각의 갈등을 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혹시라도 그 날 그 때 나와 함께였던 그녀들이 이 글을 보고

서로 안부나 전할 수 있도록 연락이 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새삼 그 때가 그리워져 이렇게 나의 블로그에 적어놓기로 했다.

힘든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코 앞에 두고 여느 친구들처럼 이젠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때에

동네 선배로부터 미아리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내가 살던 곳이 미아리에서 두세 정거장 거리인 정릉이란 곳이었기에

동네 노는 선배들 중 일부는 미아리 사창가에서 돈벌이를 찾곤 했다.

그 때만 해도 나에게는 미아리라는 곳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꽤나 두렵고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아니, 더 솔직히 좀 찝찝하기도 하고 매우 꺼려졌다.

하지만 아무 자본도 없이 일할 수 있고 돈벌이도 괜찮았으며 누구 간섭받지 않고

혼자 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제대를 며칠 앞두고

그 장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던 병장 전역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미아리에서의 마차장사를 시작했다.

장사 내용은 이렇다.

미아리 사창가는 매우 좁은 골목으로 미로처럼 연결된 꽤나 넓은 지역이다.

그 골목 곳곳에 [마차]라고 해서 커피나 꿀차를 파는 리어카들이 있다.

사창가 영업집과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곳에 일하는 여자분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유리로 된 문 밖을 바라보고 앉아있고

나는 그녀들을 서로 바라보고 앉아있는 형태이다.

그녀들과 나 사이에 사람 두 명도 나란히 걷기 힘든 골목길이 있고

그녀들은 쉴새없이 호객 행위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를 들어, 꿀차라는 것은 30개 1박스에 2천원에 들여온다.

꿀차는 그저 뚜껑을 따고 뜨거운 물만 부어 휘휘 저어주면 되는 방식이라 매우 간단하다.

가격은 1잔에 2천원을 받는다.

꿀차 한잔을 팔면 대략 1900원식이 거의 내 마진인 셈이다.

내가 관리(?)하는 가게는 6개였다.

관리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나는 그 가게에 콘돔, 휴지, 물수건 등을 매일 공급해 준다.

그리고 그 가게들은 나의 장사를 도와준다.

도와주는 방식은 이렇다.

그런 곳에 오는 남자들은 대부분 2~3명씩 함께 온다. 들어갈 대는 함께 들어가지만

그 중 먼저 일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먼저 나온 사람은 나머지 친구들을 기다리며 함께 했던 파트너와 대화를 한다.

대화내용은 맨날 뻔하다.

아가씨가 그 남자의 정력에 대해 오바하면서 치켜 세워주면

그 손님은 의기양양해서 허풍을 떠** 대는 그저그런…

그럼 그 아가씨는 목이 마르다며 저기 저 꿀차 한잔 사달라고 아양을 떤다.

기고만장해진 남자는 쉽게 응한다.

그 때 아가씨가 응석을 부리며 “아~이 나만 먹으라고?? 우리 언니들도 한잔 씩 사줘~”

하며 아직 대기중인 언니들을 가리킨다.

대략 4~5명, 남자는 흔쾌히 ok한다.

이렇게 팔리는 꿀차 수가 엄청나다.

장사를 저녁 8시부터 아침8시까지 하는데 이것 저것 다 빼고 매일 아침 나의 순수익이 대략

30~50만원 정도 되었으니까…

물론 그녀들은 그렇게 받은 꿀차를 먹지는 않는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일하는 내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기가

서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민망했다.

그녀들이나 나나 서로 젊은 사람들이고

서로 무슨 직업인지 뻔히 아는데 안 민망 할 수가 없다.

그것도 잠시

매일 저녁 8시 오픈할 때 그녀들 가게에서 함께 밥을 차려 먹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서로 쉽게 친해졌다.

하지만 각 가게들마다 이모라고 불리는 포주들이 무섭게 관리하고 있어서

뭐 사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그러지는 못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날수록 그녀들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서로 보이지 않는 위안이 되어갔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침 7시 정도 되면 장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준비를 한다.

나는 내 마차를 정리하고 나서 그 골목의 일정 구간을 빗자루로 청소를 한다.

여섯 가게 수십명의 여자들이 거의 반 나체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앉아있고

바로 코앞에서 빗자루질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매우 민망하다…)

그렇게 빗자루질을 하고 있을 때 면 그녀들은 내게 짖굿은 농담을 건네며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웃곤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 때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드라마가 최진실, 안재욱, 차인표가 출연한

“별은 내 가슴에”였다.

그 주제가 또한 선풍적이었다.

“사랑했던~ 너를 잊지 못해~ 부디~ 너를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노래

그 노래에 약간 개사를 해서

“사랑했던~ xx삼촌~ 잊지 못해~ 부디~ xx삼촌 다시 볼 수 있다면~”이런 식으로

그 주변 가게 수십명의 아가씨들이 짖굿게 큰 소리로 청소하는 나를 바라보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매우 민망하고 얼굴 빨게지는 일이다. ㅎㅎ

그리고 또 여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못을 박거나 형광등을 갈아끼우는 등의

일도 내 몫이었다.

하루는 골목길을 비추어지는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작은 ㅅㅏㄷㅏㄹㅣ를 놓고 올라가 형광등을 갈아끼우는데

또 아가씨들이 짖굿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xx삼촌~ 배꼽보여요~ 깔깔깔~”

멋쩍게 웃으며 형광등을 갈고 ㅅㅏㄷㅏㄹㅣ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못에 걸렸는지

바지 옆이 부욱 찢겨 나갔고

팔꿈치와 허벅지에서 피가 났다.

지켜보던 이모들과 아가씨들이 놀라 뒤쳐나왔지만

아픔보다는 민망함과 창피함에…ㅠㅠ

그녀들은 진정 나를 걱정해 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러명이 뛰쳐나와 나를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빨리 바지 벗으라고 성화였다.

너무 창피해 하는 나를 보고 짖굿게 장난치며 괜찮다고 벗으라고 했다.

상처난 곳에 약을 발라주고 자기들 츄리링 바지를 건네어줬다.

그리고 찢어진 바지를 꼬매어 주겠다고 서로 장난스레 “내가 꼬맬꺼야~”

“웃기지마 내가 꼬매드릴꺼야~”하며 깔깔대기도 했다.

그랬다. 항상 인형처럼 꾸미고 앉아 무료하게 문 밖을 내다보고 있어야 하는

그녀들에게는 그런 소소한 일들이

재미였고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해프닝이었다.

또 어느 날은 내가 몸살이 너무 심하게 걸려서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아파서 오늘 쉬겠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왔다.

그녀들이었다.

많이 아프냐고 병원 가보라고, 그리고 자기들이 어디서 주워들은 민간처방까지…

이렇게 하고 있어라, 저렇게 하고 있어라…

그녀들은 정말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해 보면 내 마차 서랍에는 몸살 감기약 몇봉지와 아프지 말라는 메모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렇게 대략 몇 개월을 정도를 그곳 미아리에서 생활을 했고

그녀들과 나 사이에 미묘한 친밀감은 이제 가족 그 이상이었다.

여기서 잠시 그곳의 생리를 이야기하자면

그녀들은 오후 5시에 이모라는 사람의 인솔하에 목욕탕과 미용실을 간다.

그리고 저녁 8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아침 8시에 가게 문을 닫고 이모들은 퇴근을 하는데

퇴근 할 때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꼭꼭 잠구고 퇴근을 한다.

그래, 그녀들은 그렇게 갇혀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감금이라고 보는 게 맞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녀들 대부분은 빚에 묶여서 도망갈 생각도 못했고

또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중퇴자들이라 언어구사라던가 생각자체가

일반인들보다는 매우 떨어지는 것을 느낀 적이 매우 많다.

모두 개개인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 수십몇의 여자들 중에 내가 느끼기에 참 못됐다라고 느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가슴 따뜻하고 정에 굶주려 있고 따뜻한 정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그 이후로 이곳 저곳에서 많은 여자들을 대해왔지만

대부분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일반 여자들을 봤을 때

매우 심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 적이 많다.

그래서 내 주위에 누군가가 사창가 또는 몸을 파는 여자들을 아주 비하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면 괜히 화가나서 열변을 토했던 적이 많다.

나 또한 그곳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그런 식의 시선으로 보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모르듯이

나 또한 그런 그녀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마음이 향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분들을 비하하는 생각 일절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이야기의 핵심인 대 사건이 벌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그 날도 서로 마주보고 장사를 하고 있을 때 쯤

내 바로 앞 가게 안에서 심상치 않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뛰어 들어가려 했으나 앉아 있는 아가씨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말렸다.

무슨 일인지 매우 궁금했다.

아가씨들도 매우 곤란하고 당황하는 듯 했다.

잠시 후 그 고함소리가 가까워졌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가게 이모였다.

뭔가 매우 화가나서 아가씨 중 한 명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가씨의

머리채를 끌고 나와 발로 밟고 때리고 구타를 했다.

이거 안되겠다 싶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모이기에

껴안고 웃으면서 말렸다.

“에이~ 이모 왜그래~ 참아요, 참아~”

하면서 무서움에 눈치만 보고 있는 아가씨들에게 눈치로 싸인을 줬다.

벌거벗은 채로 매맞고 있던 그녀를 몇몇 아가씨들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나와 다른 아가씨들 몇몇이 괜한 아양으로 이모 화를 풀어주려고

이모를 데리고 나왔다.

커피 한잔을 타주고 담배를 건네며 이모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때린 이유는

한쪽 다리가 없는 손님이 와서 그녀를 초이스했는데

그녀가 인상을 쓰며 손님을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그렇게 그녀를 두들겨 팼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 속이 매우 복잡해졌다.

평소에 아가씨들에게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며, 마치 그녀들의 어머니처럼 따뜻하던

그 이모라는 사람이…

그 속 생각은 그녀들을 사람이 아닌 장사하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정말이지 너무 화가 났고 역겨웠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아까 매를 맞았던 그녀는 다시 화장을 고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자기 자리에 앉아 멍하니 문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니,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꼬옥 깨물고

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정말 내가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나와 눈이 마주친다면 그녀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모멸감을 느낄 지…

평소에 삼촌, 삼촌하며 장난치던 사람에게

자신이 발가벗은 채 길바닥에서 얻어맞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매우 난감했고 또한 머리 속도 복잡해졌다.

그 날은 평소의 그녀들이 아니었다.

아까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녀들은 매우 화가 나 있고, 억울해 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난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한 가지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매우 망설여지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 날 장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왔고 나는 그녀들에게 평소보다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작별 인사를 한 후

퇴근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택시를 타고 집에가서 잠을 잤겠지만

그 날은 미아리 근처 어딘가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아침 10시

작은 철근 쇠 막대기를 하나 구해서 품속에 넣고 다시 사창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모든 가게는 커튼이 쳐져있고, 밖에서 걸어잠군 자물쇠들이 걸려져있고

인적없이 조용했다.

아까 그 가게 앞에 도착했다.

이모들은 모두 퇴근을 한 것 같았다.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주변 동태를 살핀 후

철근을 꺼내서 자물쇠 사이에 끼워넣고 힘을 줘서 비트니까, 쉽게 자물쇠가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내가 관리하던 가게 6새의 자물쇠를 모두 뜯어냈다.

소리에 놀라 무슨 일인가 내다보던 그녀들에게 이야기했다.

도망갈 사람은 지금 빨리 도망가라고.

그녀들은 매우 곤란해 하며 또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모두 안으로 들어가서

각자 짐을 챙겨나왔다.

그리고 서로 짧은 인사들을 나누고 각자 흩어졌다.

나도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상계동 쪽으로 도망쳤다.

정말 손발이 벌벌벌 떨리고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나 싶기도 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걷거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완전 다리가 풀려버렸다.

어딘가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휴대폰을 받을까 말까… 혹시, 벌써 들켜버린걸까…

지금처럼 발신번호 표시가 되지도 않는 때였기에

내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다리에 힘은 점점 더 빠져갔다.

사람이 극도로 두려우면 숨을 쉬기도 힘들다. 손도 발도 그렇게 왜 그렇게 떨리던지…

공중전화를 통해 내 휴대폰 음성사서함을 들어보았다.

아까 도망갔던 그녀들이 각자 고맙다고 언제 한번 꼭 보자는 내용의 메세지들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침에 어느 공원에서 젊은 놈이 펑펑 울어대니 산책 나와있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정말 무섭고 두려웠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다가와서 나를 잡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모들은 오후 6시쯤 출근을 하니까 아직은 이 사실을 모를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음성 메세지를 확인했더니

아까 도망갔던 아가씨들 중 한명이

자기들 지금 돈암돔에 있으니까 만나자고 했다.

나는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했던 여관으로 들어가니 5명이 모여있었다.

그 때 잊을 수 없던 기억이…

나는 매일 그녀들을 진한 화장을 한 얼굴들만 보아왔었다.

하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다시 보니 너무도 어린아이들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서로에 대해 사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모두 17~19살 정도 나이어린 아이들이었다.

가슴이 막막해졌다. 그리고 내가 잘한 짓을 했다고 여겨졌다.

그 아이들은 나에게 너무 고맙다고도 했고, 앞으로도 어떻게 도망쳐 다닐꺼냐고

걱정도 해주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자기 집에 강원도인데, 모두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 우리였고, 또한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기에 모두 기뻐했다.

그렇게 강릉에 도착했다.

그 아이의 집은 매우 허름했고 어머니라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간만에 보는 딸과 우리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녀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별반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그녀집에서늬 도피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내 휴대폰은 계속 울려댔고 받지는 않았다.

혼자 밖으로 나와, 음성메세지를 확인해 봤는데

이미 음성메세지에는 그 곳 이모들과 무서운 남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좋게 말할 때 빨리 연락해라. 너 죽여버란다” 등의 내용들…

정말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 강릉에서 우리 6명은 재미있게 놀았다.

함께 요리도 하고 바닷가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술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협박 메세지는 계속 쌓여만 갔다.

정말 두렵고 무서워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다.

괜히 이곳 강원도에 있어도 쉽게 잡힐 것 같다는 두렴도 들고…

그 때 큰 결심을 했다.

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로…

일단 미아리를 관할하는 경찰서가 종암 경찰서다.

사실 좀 두렵기도 했다. 경찰과 그런 업소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란 걸

어디서 많이 줏어들었기에…

그래도 그 때 내가 믿을 수 있는 곳은 경찰 뿐이었다.

어느 형사와 통화 연결이 되었을 때

그 간의 일을 상세히 설명을 했다.

형사가 차분히 듣더니 직접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직접 만나기는 좀 꺼려진다고. 죄송하지만 사실 꺼려진다고…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고 자기들이 강릉으로 내려올테니 강릉 경찰서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같이 내려온 5명의 여자 아이들도 함께 나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일단은 나 혼자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애들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고 일단은 경찰서 근처까지 함께 갔다가

여차하면 모두 흩어져서 도망가라고 당부를 했다.

나도 아이들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이들과 강릉 경찰서로 갔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신호를 보내기로 하고

나 혼자 경찰서로 들어섰다.

방금 전 아이들이 눈물흘리며 걱정하는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 두 명과 인사를 나눈 후, 그 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두 분 모두 친절했다.

그런데 형사분들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은 종암경찰서에서 미아리, 텍사스에 관한 아주 큰 수사가 진행되거 있는데

관련자들의 증언과 진술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극비로 진행되는 일이기에 자기들도 매우 조심스러운 상태라고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변보호는 자신들이 책임져 주겠다고 했다.

또 하나 충격적이었던 건, 사건이 벌어진지 대략 3~4일 정도밖에 안 되어있는데도

형사들은 나의 사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하지만 다소 황당한 이야기가,

내가 청량이 588의 똘마니인데 미아리로 위장취업해서 여자들을 꼬셔서 청량리

사창가로 빼돌렸다는 식으로 엉뚱한 소문이 퍼져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실 자기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이제 사실을 알고 보니 젊은 사람이 참 용기있는 일을 해주었다고 했다.

나는 고민 끝에 밖에 기다리고 있는 동생들에게 모두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각자 종이에 빽빽히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도 몰랐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각자 선불로 빚을 지게 만들고, 그 선불에 말도 안되는 이자들이 쌓여서 도망도 못가게

자물쇠로 걸어잠그고 일을 시켰으며, 임신할 경우 병원도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상한 약을

먹여서 애를 지우게 하고 매일 구타가 이루어졌으며 등등…

그 때 마음이 찡했다.

자기들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내가 다치거나 아프면 나를 먼저 걱정해주고

조금은 호들갑스럽다 할 정도로 나를 챙겨주던 모습들이 떠올라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형사들은 돌아갔고 나도 동네 친구들과 연락하며 미아리의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결과는 내가 예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이미 그곳 이모들과 건달들은 나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그들의 분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일단 강릉에서 그렇게 계속 지낼 수 많은 없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제 각자 흩어져서 자기 삶을 살아가자고 제안을 했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아이들이 울고 불고 하며 이렇게 함께 살자고 했다.

자기들이 돈벌어 올테니 모두 이렇게 함께 살자고…

그 날 우리는 펑펑 울었다. 정말 서로 불쌍하고 가엾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다시는 그런 일에 발들이지 말고 학교 중단한 아이들은 다시 학교로 가고

제대로된 직장에 취직을 해서 서로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다음 날, 막상 떠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삼척에 혼자 살고 있던 친구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삼척에서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지내고 있을 때 쯤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한달이 조금 더 지난 때였다.

뉴스에 믿지 못할 일이 보고되고 있었다.

종암경찰서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자 경찰서장이 부임을 했는데

가장 먼저 선언한 것이 미아리 사창가를 뿌리뽑겠다는,

한마디로 미아리 사창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그것이 지금 성매매 특별법의 시초였다.

그 때 그 형사분들이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다른 그 어떤 누구보다도 더욱 관심을 갖고 그 사건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에 종암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사건 진술을 해달라고…

며칠 망설임 끝에 명동에서 형사들을 만나, 함께 차를 타고 종암경찰서로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미 경찰서 앞은 미아리 사창가 업주들과 포주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고

신변보호와 익명성 보장을 요구한 후, 그 간에 내가 보았던 사실들을 모두 진술했다.

나머지 여자아이들과 연락은 하고 있었지만 형사들에게는

그녀들의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그 아이들에게 다시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날이 갈 수록 종암경찰서의 여 서장의 미아리 초토화 작전을 거세어졌고

매일 뉴스에서는 미아리에 대한 보도들이 계속 흘러 나왔다.

몇몇 연락하는 형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이번 종암경찰서 수사 자체가 내가 밀고를 해서 이렇게 된 것까지

확대되어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고…

넌 이제 잡히면 인생 종치는 거라고, 도대체 어쩔라고 이런일을 저질렀냐고…

이젠 숨어서 살아 가라고 그런 두려운 걱정 섞인 말들을 전해 들었다.

미아리 업주들 사이에 내 이름은 이미 유명해져 있다고 했다.

전국구 건달들이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고도 했고

그 날 도망갔던 몇몇 여자애들이 다시 붙들려 와서 그 사실이 맞다고

업주들에게 증언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제 23살 청년이 혼자 견뎌내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큰 사건이 되어버렸다.

정말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솔직히 제 아무리 건달들이라도 내가 어디 있는지 날 찾아내겠다 싶겠지만

그 때는 정말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에는 나설 수가 없을 정도로 공포의 나날들이었다.

일단 숨을 곳이 필요했기에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느 방직공작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쉬는 날에는 밖에도 나가지 못했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숙식이 제공되고 서울만 아니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미아리 사창가는 없어져 갔고, 그 2년 사이에

그곳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나 윤락녀 몇명이 사망하는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정신과에 가서 심리치료도 받고,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러고 3년정도 지나서 마음에 안정도 되찾았고

내 자신이 떳떳하기에

다시 미아리로 찾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떳떳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 마음에 짐을 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활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찾아갔다. 이미 많은 가게들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고

몇몇 가게들만 불이 켜진 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가게 앞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포주 아주머니들에게

예전 그 가에의 이모 이름을 대며 수소문하며 찾아다녔다.

모두 나를 무슨 형사쯤으로 아는지 대답을 피했다.

메모지에 연락처를 적어주고 내 이름을 말해줬다.

그들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도가 돌변하더니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발길질을 해댔다.

너 때문에 미아리가 이 지경이 됐다고… 죽여버리겠다고… 다 너 때문이라고…

하지만 대응하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한참 후에 그곳 미아리에 있는 해병대 초소 앞에서 예전의 이모들 중 두명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온갖 욕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나는 3년전 그 날 내가 왜 그랬는지, 또한 그 일이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고

나름 조리있게 대꾸했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뭔가 결론을 짓고 내 생활을 찾고 싶었다.

이모들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나는 어떤 아저씨들에게 끌려가 얼음 창고에서 정말 죽지 않을 만큼 얻어 맞았다.

나는 그 종암경찰서 여 서장의 사건과 내가 저지른 사건이 관련 없음을

그리고, 다른 이익을 위해서 저지른 일이 아님을 주장했고

그들은 주먹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다음 날 풀려나와

다시 미아리 근처에서 나를 보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만 받고 그 일은

그렇게 일단락 되었다.

그 날 눈과 입술이 퉁퉁부었고 온몸이 쑤시고

다리를 절름거리며 걸어나와서 피우던 그 담배 한 모금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의 첫 시작이었던 군 제대날 보다도

나에게는 그 날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내 3년동안의 도피 생활은 끝이 났고

내 마음속의 짐도 그때서야 내려놓았다.

그 이후로도 가끔씩 그녀들이 생각나곤 한다.

이미 10여년이 지나서 얼굴도 이름도 전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 때 그 날 있었던 일이 그녀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옳은 일을 했던 것일까?

만약 이 글을 읽게 되어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서로에게 매우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소주 한 잔하며 지난 일들을 추억해 보고 싶다.

내가 사는 곳이 미아리 근처이기에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보면

미아리를 지나갈 일이 있다. 그럴 때면 버릇처럼 그곳에서 내려 그 골목길을 걷곤 한다.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해서 거의 흔적이 사라지긴 했지만

별볼일 없이 살아온 내 자신에게는

가장 뿌듯하고 용기있는 일들이었기에

그 때를 추억해보기도 한다.

그곳에서 흘려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눈물과 한이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오기도 한다.

남들에게는 *** 년이라 손가락질을 받지만

각자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아픔들을 내색도 못하고 다만 몇만원에 아무 남자 품에

안길 수 밖에 없었던

그 뼈저리게 아픈 기억들을 그녀들이 모두 잊고

10년이 지난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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